배우는 것은 즐거운데, 내가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하는 분야들이 좀 있다.
예를 들어서 법의학이 딱 그런 분야인 것 같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법의학 교실을 갔다오기도 했고, 학교 수업도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었는데
처음에는 병리공부를 하고 법의학을 해도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점점 알아갈수록 어려운 분야인 것 같다.
일단 너무 고려해야 하는 점이 많다.
온도, 습도, 햇빛 등의 여러 환경.
이 사람이 내심 범인이길 바라는 혹은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이길 바라는 주관적 심리.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분석.
그런 여러 어려움 속에서 나온 객관적이지만 확률적인 증거를 가지고 법정에서 법의학을 잘 모르는 법조인들에게 진술 및 반대심문도 굉장히 힘들 것 같다.
일반적인 법의학도 어려운 파트라고 생각되는데
이 책의 저자는 법의생태학자이다.
이것은 시신이 아닌 시신 주변의 생태학을 이용하는 분야이다.
특히 저자는 화분(花粉)학자, 즉 꽃가루(pollen) 분석을 하는 사람이다.
꽃가루는 정전기를 통해 사물에 달라붙고 생각보다 잘 안 떨어지는데
지역마다 식물의 생태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꽃가루가 있느냐에 따라 어느 지역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비강 내 꽃가루 분석을 통해 살아있을 때 현장으로 왔는지, 죽은 이후에 옮겨졌는지 등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여러 꽃가루를 구별할 수 있는 학자가 채취한 시료를 일일히 현미경으로 보아서 확인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에 보면 특정 사건에서 발견된 꽃가루의 숫자가 굉장히 구체적으로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현미경으로 보이는 세포 숫자 세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서로 다른 종류의 꽃가루를 각각 세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 것 같다.
책의 내용은 범죄에서의 분석 뿐 아니라 저자의 인생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해준다.
읽으면서 꼭 소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허약하고 순탄치 않았던 시골 소녀의 삶 같고
중간에 회사도 다녔다가
다시 대학원에 가서 화분학자가 되어 고고학을 연구하다가
우연찮게 걸려온 경찰의 전화 한 통에 범죄 현장을 분석하는데 실제와 틀리지 않아서 신임을 얻게 되고,
이후 계속해서 그런 일을 맡아오며 법의생태학의 기틀을 다졌다.
저자는 자신의 삶이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 삶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 꾸준히 노력을 해서 그 결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부러운 삶이기도 하고, 대단한 삶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는 흥미로운 것을 파고드는 힘이 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점점 커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흥미가 있어도 시작하기가 어렵다.
오랜만에 열정을 가진 분의 책을 보니 그런 파고드는 힘을 다시 갖고 싶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환기가 되는 것 같다.
이런 책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옛 말에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 같다'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딱 그 느낌을 받았다.
한 사람이 일궈낸 학문의 발전과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인문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흥미로웠던 책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