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 시절에 국제보건 동아리를 했었다.
국제보건은 "Health for all"을 모토로 하여, 어떻게 하면 소외되지 않고 모두의 보건 수요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당시에 여러 책, 다큐멘터리 등을 기반으로 공부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피 속의 혈투 (2017)>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해당 다큐는 거대 제약회사들이 에이즈 치료제로 특허로 폭리를 취하는 현실에서
제너릭 의약품의 제조와 판매를 허가하도록 정치적으로 맞선 이야기이다.
제너릭 의약품이란 오리지널 의약품과 성분이 동일하게 제작한 의약품이다.
나는 해당 다큐를 굉장히 인상깊게 보았다.
물론 제약회사가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긴 하지만
치료제의 개발비 중 국가 펀드도 있기 때문에 그 개발비를 다 회수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같고
어차피 제너릭을 구매할 사람들은 오리지널은 비싸서 안 살텐데, 좀 풀어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라벨 뒤의 진실』이라는 책을 읽고 제너릭 의약품 산업은 단순하게 보건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인도의 제너릭 의약품 회사였던 '란박시'의 실태를 메인으로 한 르포이다.
미국의 한 제약회사에 일하고 있던 인도인 타쿠르씨는 조국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과 가족의 삶을 위해 란박시로 이직을 하는데,
해당 기업은 수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환자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었다.
위생관리가 잘 되지 않는 공장, 품질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수치를 조작해서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것을 문제 삼자 '어차피 흑인들이 죽는 건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말하는 상사.
해당 기업은 품질이 그나마 좋은 건 미국이나 유럽 등으로 판매하고, 품질이 보통인 것은 내수용, 아주 나쁜 것은 아프리카로 판매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품질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약은 하나도 없었다고...
결국 타쿠르는 회사를 때려치고 나온 뒤에 FDA에 해당 내용을 고발하였다.
그렇지만 FDA는 인력 부족 및 비자 문제로 외국 기업에 대해 불심검문이 불가하였고,
심지어 검문하라고 보내놓은 자가 뇌물을 먹고 무조건 통과를 시켜주었다.
또한 확실한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 제너릭 의약품 승인을 안 내주는 것은 불가하였다.
그 와중에 미국의 의사들은 제너릭 의약품으로 변경하게 되면 환자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경험하였고,
아프리카 의사들은 오리지널이라면 2.5mg을 처방하는 것을 10mg으로 처방하였다(그래도 효과가 적거나 없어서 비상용으로 오리지널을 사 두었다고 한다).
결국 십 년이 넘게 사건은 흘러갔고, 타쿠르는 성공한 내부고발자가 되었지만 가족과의 사이가 나빠지고,
표면적으로는 란박시가 망해서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제너릭 의약품 제조기업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망한 란박시의 직원들, 즉 서류 조작의 전문가들은 타 제너릭 의약품 회사에 취직하였다고 한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냥 더 많은 환자들이 약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 목표였을 텐데
기업의 이기심과 정치적 상황, 글로벌화 된 현실 등이 전부 안 좋게 맞물려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 같다.
지금까지 국제보건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상황만 바라보면서
제너릭을 허가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고만 생각한 내가 참 부끄러웠다.
질 나쁜 약을 허가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인데, 오리지널의 가격을 유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또 품질관리일텐데...
그래서 시민행동은 단편적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 같다.
제너릭을 허가하라!라고 시위를 했다면, 허가 이후에는 잘 관리되고 있는지 감시도 해야 한다.
정치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투표라고는 하지만
다수결의 투표로 결정되는 이 사회는 무엇이 올바른지,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가 아니라
누가 인기가 더 많은가로 사회가 흘러가서
올바른 일을 행할 때 정치가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수결의 투표가 아닌 다른 방식을 택하자니, 딱히 더 나아 보이는 방안도 못 찾겠다.
이 책에서 밝힌 내용은 조직적인 사기이다.
그러한 조직적인 사기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믿을만해야 한다.
사기를 친다면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할 수 없고 불이익이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 본 뉴스 중 하나가 <'불가리스가 코로나19 예방' 광고…남양유업 벌금 5000만원> 이었다.
코로나 시절에 감염내과 실습 시 가짜뉴스 때문에 처방약 말고 약보다 훨씬 비싼 영양제나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먹겠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그런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이 고작 오천만원이라니, 사기 칠 만한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어야 할까.
세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좋지 않긴 하지만
이런 르포를 보고 나면, 그리고 오늘자 뉴스를 훑어보다 보면 회의적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