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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잠에 들지 않더라도 피곤하지 않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미레티아 2023. 4. 22. 21:51
내가 쓴 답: 병원에 간다.

 

썸원이라는 어플이 있다.

커플끼리 매일 일문일답을 할 수 있는 어플인데

사백몇번째 질문이 이런 내용이었다.

 

만약 잠에 들지 않더라도 피곤하지 않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아마 어플 개발자가 의도했던 대답은 애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여행도 가고 그런 것일 터이지만

나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 제 1형 양극성 장애가 의심되므로 병원에 가야한다고 적었다.

(나랑 같이 썸원하는 친구야, 미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질환을 진단할 때는 진단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각 과별로 진단기준을 만들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정하는 과정들이 있는데,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은 DSM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기준을 따른다.

현 시점에서는 아마 5판의 개정판 나와서 DSM-5-TR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DSM-V-TR이라 쓰는 게 맞나? 잘 모르겠다)

 

비의료인이 흔히 알고있는 '조울증'이라는 질환은

단순히 우리가 예능이나 언론에서 '얘 조울증인가봐~'하면서 보여지는 감정기복 수준이 아니며,

정신건강의학과 용어로는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라고 부른다.

양극성 장애는 증상의 정도에 따라 1형과 2형이 나뉜다.

표기를 로마자로 하는게 맞는지, 숫자로 하는게 맞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가진 책에는 양극성장애 I형, 양극성장애 II형이라고 적혀있다.

 

양극성장애 I형이란, 일생 중 조증삽화가 1번이라도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조증삽화는 무엇인가?

다음의 A부터 D까지의 기준을 만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략화해서 적었으므로 구체적인 구구절절한 진단기준은 DSM책을 참고하라.
아마 대형서점 어딘가에 꽂혀 있을것이다... 일단 우리동네는 4판이 있음)

A. 비정상적으로 들뜨거나(elevated), 확장되거나(expansive) 과민한(irritable)한 기분이 
     적어도 1주일 이상 거의 매일 지속되거나
     기간과 상관없이 입원이 필요할 만큼 심하다.
B. A와 같은 기분 상태에 있을 때 아래 증상 중 3개 이상 (만약 과민하기만 하다면 4개 이상)
  1) 자존감 증가, 과대성
  2) 수면요구 감소 (ex. 3시간 수면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낌)
  3) 말이 많아지고 계속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
  4) 사고비약, 사고분주
  5) 주의산만 (주관적 or 객관적)
  6) 목표 지향적 활동 증가, 정신 운동 초조
  7)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활동에 몰두 (ex. 과소비, 사업추진, 성적문란)
C. 그런 증상들 때문에 사회적, 직업적 기능에 장애 or
     자해, 타해를 예방하기 위한 입원이 필요 or 
     정신병적 양상이 동반
D. 위 증상이 물질남용이나 다른 신체질환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B에 2번 항목이 딱 썸원 질문이다.

물론 A부터 D까지를 만족해야 하므로 해당 증상만 있다고 양극성장애로 진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정도는 잠을 안 자도 괜찮은 날이 있을 수 있지 뭐...

 

그렇다면 양극성장애 II형은 무엇인가?

1번 이상의 주요우울삽화와 1번 이상의 경조증삽화가 있는 경우를 의미하며,

조증삽화는 없어야 한다.

경조증삽화는 아래와 같다.

A. 비정상적으로 들뜨거나(elevated), 확장되거나(expansive) 과민한(irritable)한 기분이 4일 이상
B. 조증삽화의 B항목과 동일합니다.
C. 명확한 기능의 변화
D. 다른 사람에 의해 관찰이 된다
E. 기능장애가 심하지 않고 입원이 필요한 정도가 아니며, 정신병적 양상이 없다.
F. 위 증상이 물질남용이나 다른 신체질환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양극성 장애는 인생 전체에 있어서 조증삽화가 있었는가, 경조증삽화가 있었는가에 따라 진단이 정해지므로

증상 발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환자들을 진단하기에 어려운 항목이기도 하다.

환자가 주요우울삽화로 병원에 와서 주요우울장애라 진단하였는데

나중에 경조증삽화가 생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진단기준이 주요우울증에서 양극성장애 II형으로 변경이 되며,

사용해야 하는 약도 변경이 된다.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실습을 돌 때 보았던 양극성장애 I형은 아주 명확했다.

하지만 양극성장애 II형은 잘 모르겠었다.

가장 어려워했던 것 중에 하나는

이 환자가 경조증 삽화인 것인가? 아니면 그냥 원래 해맑고 들뜬 사람일 수 있지 않은가? 였다.

과연 '삽화'는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인가?

정의에 따르면 삽화는 '증상이 계속 지속되지 않고, 일정 기간 나타나고 호전되기를 반복하는 패턴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n년동안 신나있는 경조증삽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기 진단기준에는 4일 이상이라고 했지, 며칠 이하라는 말은 안 했고

기능장애가 심하지 않으니까 인생 살아가는 데 지장은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Trait라는 개념을 설명해주셨다.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략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며, 사람마다 다른 성격적 특징을 의미한다.

약간 빅파이브 성격분석이나, 아니면 인사이드아웃 등을 생각하면 편할 것 같은데,

아마도 내가 어려워했던 환자는 양극성 장애 II형일 수도 있지만

trait 자체가 에너지있고, 활발하고, 들뜬 사람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질환 특성상 환자를 오래 봐야 한다고 하셨다.

 

하긴, 의사는 한 개인의 인생의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인데,

그 인생 전체를 어떻게 다 파악하겠는가.

단지 찰나의 순간에 결정하는 치료제가 해악을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하여간,

썸원을 같이 하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는데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으면

한 일주일 지켜보고 병원에 방문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p.s. 요즘 나는 자도자도 피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