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초록별] 안녕, 나의 가시많은 선인장 (2021.03.06.~2024.02.21.)

미레티아 2024. 2. 21. 22:03

안녕, 삐죽아.

넌 내 생일을 맞아 동기들이 선물해준 선인장이었지.

푸른 빛이 도는 회색 화분에 담겨 포장지로 둘러싸인 너는 참 작고 가시가 많았지.

선물받은 날

어릴 적 비모란 선인장을 키우다가 죽은 적이 있어.

당시 왜 죽었는지 기억은 안 나.

죽어서 버린 장면조차 사실 기억이 안 나.

그냥 중간에 화분을 한 번 실수로 떨어뜨려서 엎었던 기억이 있어.

학원 가기 전이었는데, 황급히 흙을 주워담았었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그때 그 비모란처럼 되지는 않게 노력하겠다, 생각했어.

한 달에 한 번 물을 주라고 해서 정말 매달 1일이 될 때마다 물을 주고,

겨울에는 물을 주지 말라고 해서 잠바를 꺼내기 시작하면 물을 안 줬어.

햇빛 많은 것을 좋아한다길래 기숙사 창문에 올려두었지.

방학에는 어디서 받았는지 모르겠는 와인칠링백에 잘 넣어서 집으로 데리고 오고

햇빛 잘 드는 거실 피아노 위는 너의 자리였지.

한 2개월 키웠을 때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길렀는데

열심히 찾아보니 아마 금호였던 것 같아.

가시가 흰색에 가까워서 금호가 맞나? 백호인가? 생각이 가끔 들었지만

뭐 어때, 종이 중요하니, 건강한 게 중요하지.

 

너 예쁘게 컸다고 칭찬도 많이 받았어.

동그랗고 짙은 초록색에

가시가 용맹하게 솟아있는 모습이

참 예뻤지.

꽃이 피려면 30년은 키워야 한대서

적어도 30년은 동그랗게 잘 키워야지,

그러면 미래의 남편이 너를 이해를 잘 해줘야 할텐데, 하는 상상도 하며

즐겁게 지냈어.

(좌) 1년 키웠을 때 (우) 2년 키웠을 때

그렇게 2년을 길렀나,

너는 화분이 버거울 정도로 커졌어.

와인칠링백에 들어가지도 않았지.

자리를 바꿔줘야겠다, 하고 집에 있는 화분으로 분갈이를 해줬지.

바꾼 화분은 갈색이라 정말 너가 선인장이라는 것이 실감났던 것 같아.

왜, 선인장 그림을 보면 대부분 갈색 화분 위에 그려져 있잖아.

고양이 무드등, 월동자, 선인장

 

그러고 몇 달 후, 문득 너를 바라보면 밑동 색이 이상한거야.

가시가 있는 부분도 색이 이상해졌고.

뭐지?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육안상으로는 밑부분과 가시의 일부분 색이 확연히 달랐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보통 무르면 색이 변한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때는 가을~겨울이었단 말이지.

물도 안 줬는데 무른다고?

면봉으로 쿡쿡 쑤셔보았는데 심지어 약간 말랑했어.

진짜 무른건가?

하지만 노란색은 아니고 초록빛이 도는 갈색이었는걸?

곰곰히 생각하고, 계속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졌어.

 

아참, 내가 선인장 분갈이가 처음이었어.

혹시 분갈이를 잘못한 게 아닐까?

이전에 키우던 식물도 분갈이를 하고 죽었단 말이지.

 

식물병원에 데려가고 싶었는데 가능한 시간은 다 매진되어서

인터넷의 식물병원에 사진을 자세히 해서 올렸어.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분갈이 할 때 말리지 않았다면 밑동이 썩을 수 있다.

밑동이 썩었다면 잘라야한다.

(cf. 경기도농업기술원 사이버식물병원 https://www.plant119.kr/dxReq/diagnosisRequestList.do)

 

비가 오는 날,

엉엉 울면서 너를 꺼내서 자르는데

아주 멀쩡하더라.

이런, 식물박사들이 내 사진을 보고 잘못 판단한건가.

색이 변한 부분은 그냥 껍질이 한 겹 있는 거였어.

찾아보니 너무 깊이 심어서 근부화가 된 것 같더라.

(좌) 뽑았을 때 모습 (우) 색이 변한 밑동 부분을 정리하다가 사실 멀쩡하다는 것을 깨닫고 정리만 해 준 상태

 

어쩌겠니,

너무 미안했어.

잘 말려서 다시 심어주었지.

말리는 과정에 너무 쪼글하고 노래져서 걱정했는데

물 주니 다시 통통해지고

햇빛 보니 다시 초록색이 되어 기뻤어.

 

그러다 어느날,

창틀 청소를 하다가 화분이 두 개가 동시에 떨어졌어.

오른쪽으로는 용과, 왼쪽으로는 너.

용과의 팔이 부러질까봐 황급히 잡았는데

너는 바닥에 들이박고 화분도 깨졌지.

난 또 울고,

얼른 남는 화분에 넣어주었어.

박살난 선인장 화분

 

그런데 이후로 너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한쪽이 무르는거야.

아래쪽부터 무르면 과습이겠거니, 했는데

한 쪽이 무르니 그 때 떨어져서 상처가 났고 거기로 감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지.

하필 그것도 모르고 가습기를 열심히 틀었고,

하필이면 올해의 남은 겨울이 습하더라?

비오고,

지금도 비가 오네.

이번주 일주일 내내 비가 온대.

 

상처를 잘 도려내서 말려주었는데

다시 흰 곰팡이가 슬며 시들시들하길래

뽑아서 잘라보니 이미 생장점까지 다친 상황이었지.

생장점이라도 살아있으면 더 노력해볼까 싶었는데,

이제 더 이상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좌측 상단) 외과적 절제한 날 (나머지) 오늘,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

 

너와의 이별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내가 좀 더 일찍 외과적 처치를 고려했다면 살 수 있었을까?

내가 좀 더 과감하게, 더 깔끔하게 잘랐더라면 살 수 있었을까?

내가 좀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까?

떨어지는 용과 대신 너를 잡았다면 문제가 없었을까?

 

이렇게 후회하다보면 끝도 없겠지.

그 끝에 남을 탓하게 될 가능성도 높을 것 같다.

사실 이미 절반은 남 탓 하고 있어.

죄책감을 줄이려고.

 

안녕, 나의 가시 많은 선인장아.

 

항상 창가에 서 있으며 나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너와의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

식물에 대한 것부터,

자세한 건 이야기 못하겠지만 직업적인 부분, 인생에 대한 부분에서도 배운 게 있었어.

너의 기억에 내가 고마울지는 잘 모르겠다.

멀쩡한데 자르고 멀쩡하지 못한데 기다려보는 못난 주인이라서.

 

초록별에서는 더 많이 뚱뚱해지고 짙어지며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렴.

이미 가 있는 친구들에게 내가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안녕, 삐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