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나의 식물들 다 잘 자랐으면...

미레티아 2023. 10. 1. 11:56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 민트에디션 (근데 카메라 컬러가 왜 이러냐)

2년 전, 선물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해 어디 밖에 나가서 밥 먹기도 두려운 때, 기숙사에서 나의 생일을 맞았다.
동기들이 고민하여 사 온 나의 생일선물은 바로 선인장.
사실 나는 어릴 때 선인장을 키우다 죽여본 적이 있다.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물을 극단적으로 줘서 그런 것 같다.
'선인장이니까 물 안 먹어도 되겠지~' 라면서 한참 동안 안 주다가, '어? 너무 오래 안 줬는데?' 하면서 왕창 주고.
과습으로 죽었는지 말라죽었는지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지만 그 때도 선물로 받은 선인장이어서 슬펐다.
선물 준 사람에게도 미안하고, 더 오래 살 수 있었을텐데 못난 주인 만나서 일찍 죽었으니까.
그래서 선인장을 딱 선물로 받았을 때 다짐했다.
내 반드시 이 선인장은 죽이지 않으리라.
 
선인장을 잘 키우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
첫째로 햇빛 아닐까?
그런데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어디지?
처음에는 창문 옆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그런데 햇빛은 창문을 들어오며 일부 빛을 흡수한다.
그래서 창문 옆에 있어도 인간이 비타민 D를 합성하기 힘든 것처럼 혹시 선인장도 그러지 않을까?
차라리 밖에 내놓는 것이 나으려나?
둘째로 물이 의문이었다.
물을 적게 먹는 친구라는데, 그 적게의 기준은 무엇이지?
며칠에 몇 ml를 주어야 되는 것일까?
 
다행히 근 2년동안 대충대충 키웠지만 나의 선인장은 잘 자랐다.
그런데 요즘, 화분이 늘었다.
월동자, 끈끈이주걱, 호야,....
어쩌다 식물을 선물 받는 복이 늘었는지 모르겠지만,
얘네는 선인장과 다르니까 막 키웠다가는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이 있는 와중, 언니가 책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드루이드가 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이었다.
사실 드루이드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이건 뭐지, 라는 생각이 처음에 들었지만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했다.
그래, 그러면 나의 화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는지 볼까?

처음 펼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어, 이거 디자인만 예쁜 책인가?'였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디자인이 예쁘고 글이 감각적이면 내용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20페이지 쯤 넘기고 나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딱 22페이지에, 내가 2년 동안 갖고 있던 의문을 풀어주는 내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햇빛이 드는 정도'
저자는 Full sun(야외), 5(쨍쨍 창가), 1(반그늘), 0(반사빛 존재), K(어둠)로 나누어서 햇빛의 양을 설명해주었다.
어느 위치인지, 햇빛이 얼마나 걸러진다고 보는지 등등.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흔히 키우는 식물들이 버틸 수 있는 햇빛의 영역까지.
인상깊었던 건 '건강하게 자라는 영역'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었다.
우리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을 키우는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일이 많은데 식물의 입장을 고려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난 그 생물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나의 모든 식물은 5 영역에서 살고 있고, 다행히도 모든 식물에게 '건강하게 자랍니다' 영역에 해당했다.
 
햇빛 외에도 물과 바람 등 여러 환경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내가 중요시하지 않았던 흙과 화분의 선택, 온도, 바람 등에 대한 내용과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는지, 그런 현상이 보이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실 화분의 선택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 나에게는 아주 새로운 정보였다.
선인장을 분갈이 할 때 대충 본가에 굴러다니는 화분을 주워오긴 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없으면 분갈이를 자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엄청 큰 화분에 심어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선인장은...가시 때문에... 분갈이가 무섭다... 흑)
하마터면 과습으로 죽일 뻔했다.
그리고 작년인가, 나의 화분에 귀엽지 않은 투명하고 작은 벌레들이 좀 붙어있길래
손소독용 알콜분무로 칙칙 뿌려서 죽였는데
'적군과 아군'으로 소개되는 벌레의 아군 친구들과 너무 닮아서 굉장이 미안했다.
(아마 톡토기 아니면 오이이리 응애 정도 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벌레잡겠다고 알콜분무도 좀 이상하긴 한데 다음에는 좀 알아보고 처리해야겠다.
구글 이미지 검색이 아무리 잘 발달했어도 그런 벌레 친구들을 알기는 어려운데
책에 적군과 아군 벌레들을 한 큐에 모아놓은 사진이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의 장점은 세 가지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가치관. 둘째, 과학적. 셋째, 실용적.
1) 가치관은 식물 중심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고, 이 점이 맞지 않은 사람이 책을 본다면 '뭐 식물에게 이런 식으로 정성을 들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그 가치관이 마음에 들었다.
2) 과학적이라는 것은 증산작용, C3, C4 식물 등 식물과 관련된 기초적 과학 지식을 소개해줬다는 뜻이다.
사실 이렇게 키우면 된다, 외우기는 쉽지만 그 원리를 이해하면 나중에 응용도 가능하기 때문에 괜찮은 서술이었던 것 같다.
3) 실용적이라는 것은 어떤 식물은 이렇다, 라는 것을 정리해두고 사진자료도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모든 식물을 잘 키우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주어진 친구들을 잘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내 식물에게 맞는 건 무엇인지, 여기 기어다니는 이 벌레들은 누구인지 등 실용적인 부분들이 필요했는데
그런 내용도 적당히 잘 들어가 있어서 좋았다.
 
단점도 세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 찾기 힘듦, 둘째, 레퍼런스 정리, 셋째,  무겁다.
1) 찾기 힘들다는 것은 식물별 정리, 각 재료별 물을 흡수하고 있는 정도 등 그래프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서 그냥 쭉 따라가면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식물에 대해 알지 못해서 뭔가 분류가 있는데 모르는 것일 수도 있는데 원하는 것을 찾기가 직관적이지는 않다.
가나다 순으로 되어있던가, 비슷한 환경인 친구들끼리 있으면 좀 나았을 것 같다.
물론 (책을 구매한 경우) 볼펜이나 포스트잇 플래그로 표시해두면 상관은 없긴 하지만 나는 웬만하면 책에 손대지 않는 것을 좋아해서...
2) 대부분의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책들은 레퍼런스(참고 문헌)가 달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가 완전 전문가라면 그런 레퍼런스를 안 달기도 한다.
이 책은 보니까 저자가 모든 것을 알고, 공부하고, 사진을 다 찍고, 아주 열심히 쓴 책이다.
그런데 그래서 좀 아쉽다.
나는 이 책의 내용보다 더 알고 싶은 점도 있는데, 이쪽 전공이 아니다보니 대체 무슨 책이나 문헌을 봐야할지부터 막막하다.
이 책을 통해서 '아, 이런 점도 있구나, 이 점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 라는 마음이 있는 분들께
자신이 식물을 잘 키우기 위해 공부했던, 유용했던 문헌을 달아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무겁다는 것은 말 그대로 풀컬러라서 책이 무겁다.
처음 목표는 지하철에서 읽는 것이었는데 바로 포기했다.
하지만 무거운 것보다 풀컬러의 장점이 더 많긴 해서 그렇게 큰 불만은 아니다.
 
가을이다.
이제 나는 더 바빠질 테고 식물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도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나름 책도 읽고 공부를 좀 했으니
좋은 환경을 최대한 마련해줄테니
나의 식구로 들어온 식물들이 모두 잘 자라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치겠다.

#드루이드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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